1989년에 멕시코와 미국 당국은 약 한 달 동안 학생 마크 킬로이를 수색했고, 결국 희생 의식을 통해 그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1989년 3월 14일, 텍사스 대학교 학생인 21세 마크 킬로이는 친구들과 함께 미국 국경을 넘어 멕시코의 마타모로스에 있는 술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킬로이는 그 후 실종되었습니다. 약 3주 후, 멕시코 경찰은 한 남성을 마리화나 소지 혐의로 체포했습니다. 당국은 마타모로스에서 약 32km 떨어진 그의 가족 목장을 수색하여 더 많은 마약을 찾아냈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비극이었습니다.
마크 킬로이. 사진: AP
1989년 4월 11일, 지역 당국은 촛불, 동물 두개골, 그리고 유해가 있는 제단을 발견했습니다. 15명의 희생자 중에는 킬로이도 있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토막이 나 있었고, 그 일부 조각들은 쇠 가마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인간 희생이 초자연적인 보호를 제공하고 마약 밀매 사업을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믿었던 한 종교 단체의 의식이었습니다.
언론에서 '나르코사타니스트(NarcoSatanists)'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 종파는 마타모로스 인근 농장을 거점으로 삼아 매달 약 450kg의 마리화나를 미국으로 밀수했습니다. 이 종파의 지도자인 미국인 아돌포 데 헤수스 콘스탄소는 사이비 종교 신도들에게 "대부(The Godfather)"로 불렸습니다.
콘스탄조는 1962년 미국 마이애미에서 태어났습니다. 십 대 시절, 콘스탄조는 지역 "무당"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동물 희생을 수반하는 팔로 마욤베라는 종교를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콘스탄조의 계부는 마약 밀매에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성인이 된 콘스탄조는 멕시코시티로 이주하여 사이비 종교 집단을 만들고 수많은 추종자들을 모았습니다. 그들은 행운의 부적을 바치고 동물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의 의뢰인 중 상당수는 부유한 마약상과 암살자들이었습니다. 콘스탄조는 또한 부패한 멕시코 경찰관들을 만나 악명 높은 마약 카르텔을 알게 되었습니다.
멕시코 마타모로스의 나르코사타니스트 종파 지도자 아돌포 데 헤수스 콘스탄소. 사진: 보컬 미디어
콘스탄초는 자신의 "마법"이 마약 카르텔의 원활한 운영에 도움이 되었고, 여러 주요 조직과 사업 파트너가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컬트는 의식용으로 유해를 파내기 위해 묘지에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사람들을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널리스트 게리 카트라이트는 1989년 6월호 Texas Monthly 잡지에 "콘스탄조는 종교의 이름으로 많은 형태의 마인드 컨트롤을 실행했다"고 적었습니다.
콘스탄조의 부하들이 술집 밖에서 마크 킬로이를 납치하여 농장으로 데려갔습니다. 콘스탄조는 학력이 높은 피해자가 자신의 "마법"으로 더 강력해질 것이라고 믿었기에 의대생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사건이 폭로되자 콘스탄조와 네 명의 추종자들은 멕시코시티로 도피했습니다. 1989년 5월, 아파트에서 경찰에 포위당하자 콘스탄조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을 사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1989년 텍사스에서 열린 킬로이 추모식. 사진: AP
콘스탄소는 처벌을 면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멕시코 정부의 살인 사건 조사 결과 14명이 기소되었고, 그중 5명은 수십 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한편, 킬로이의 부모인 제임스와 헬렌은 아들의 이름을 딴 약물 남용 방지 비영리 단체를 설립하여 슬픔을 달래려 했습니다.
"우리는 마약과의 전쟁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그저 앞만 보려고 노력합니다." 제임스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몇 달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 호앙 ( 워싱턴 포스트 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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